리모컨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것
출처: “Flow, the secret to happiness” — Mihaly Csikszentmihalyi, TED · 영상 보기
저는 저녁이 되면 일단 소파에 눕고 리모컨을 집어 듭니다. 하루 종일 애쓴 나에게 주는 보상이랄까요. 채널을 몇 번 돌리고 나면 딱히 재미있는 것도 없는데 계속 보게 되고, 한 시간쯤 지나면 쉬었다는 느낌보다는 “나 지금 뭐 했지” 싶은 멍한 기분이 듭니다. 쉰 건 분명한데 왜 개운하지가 않을까요.
쉼과 멍함은 다른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저는 ‘쉼’을 ‘아무것도 안 하기’와 같은 말로 써 왔습니다. 피곤한 날엔 당연히 그래야 할 것 같고, 주변에서도 다들 그렇게 저녁을 보내니 별 의심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몸은 쉬었는데 기분은 안 풀리는 날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뭔가 다른 종류의 ‘쉼’이 따로 있는 게 아닐까 싶어지는 순간입니다.
스키장에 눈이 다 녹아버린 날
이 질문을 평생 파고든 사람이 있습니다.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2차 세계대전 통에 유럽에서 자랐는데, 전쟁으로 삶이 무너지지 않고 멀쩡히 버텨낸 어른이 드물다는 걸 보며 “무엇이 삶을 살 만하게 만드는가”를 궁금해했다고 합니다. 심리학을 공부하게 된 계기도 꽤 엉뚱한데, 스위스 스키장에서 눈이 다 녹아 버려 심심하던 차에 영화 볼 돈도 없어서 공짜 강연을 들으러 간 게 전부였다고 하죠. 그렇게 흘러간 삶이 결국 작곡가, 시인, 운동선수, 수도사, CEO까지 8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40년짜리 연구로 이어졌습니다.
몰입, 그리고 한 줄짜리 공식
그가 찾아낸 공통점에 이름을 붙인 게 몰입(flow)입니다.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다는 느낌조차 희미해지면서, 그 일 자체가 보상이 되는 상태요. 작곡가들은 손이 저절로 움직인다고 말하고, 올림픽 스케이트 선수도 비슷한 말을 한다고 하니 분야는 달라도 느끼는 건 똑같은 모양입니다. 몰입이 언제 오는지는 공식처럼 정리됩니다.
흥미로운 건 돈은 이 방정식에 거의 안 들어간다는 점입니다. 1950년대부터 미국에서 소득이 두세 배씩 늘어도 “나는 매우 행복하다”고 답하는 사람 비율은 거의 그대로였다고 하니, 월급이 쉼의 질을 올려 주지는 않는 셈입니다.
가장 쉬는 것 같던 시간이 가장 비어 있었다니
그리고 여기서 제 리모컨 얘기가 다시 나옵니다. 그의 조사에서 사람들이 가장 자주 하는 활동인 TV 시청은, 몰입이 일어나는 비율이 겨우 7~8% 정도였다고 합니다. 나머지는 도전도 없고 실력을 쓸 일도 없는 ‘무관심’ 상태에 가깝다는 거죠. 가장 쉬는 것처럼 보이는 행동이 사실은 가장 비어 있는 시간이었다니, 왠지 제 저녁 시간표에 대한 뒷담화를 들은 기분입니다.
그래서 요즘 저는 저녁에 리모컨 대신 조금 버거운 일을 하나 끼워 넣어 보려 합니다. 안 풀리는 글 한 단락을 붙잡고 있거나, 서툰 악기를 삑삑거리며 연습하거나, 살짝 긴 산책 코스를 걸어 보는 것처럼요. 거창할 필요는 없고, 그냥 지금의 제 능력보다 반 걸음 정도만 어려우면 됩니다.
오늘 저녁에도 리모컨은 아마 제 손이 닿는 곳에 있을 겁니다. 다만 한 번쯤은, 집어 드는 대신 조금 어려운 일을 향해 손을 뻗어 보려 합니다. 결과가 어찌 되든, 적어도 “나 지금 뭐 했지” 하는 멍한 기분보다는 나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