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CE LOGBOOK

OCEAN LOGBOOK

수도꼭지에 스티커를 붙인 수도사

2026.09.28

수도꼭지에 스티커를 붙인 수도사

2026.09.28

출처: “Want to be happy? Be grateful | David Steindl-Rast” (TED) — 영상 보기
교차 확인: Emmons & McCullough, 2003

아침에 세수하려고 수도꼭지를 돌립니다. 물이 나옵니다. 너무 당연해서, 그 순간 저는 물이 아니라 오늘 할 일 목록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본 짧은 강연 하나 덕분에 수도꼭지 앞에서 잠깐 멈칫하게 됐습니다. 물이 나와서가 아니라, 물이 나오는 걸 제가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다는 걸 알아채서요.

행복해지면 감사하겠다는 약속

우리는 보통 순서를 이렇게 생각합니다. 좋은 일이 생기면 행복하고, 행복하면 감사하다. 그래서 감사는 늘 ‘나중’ 몫이 됩니다. 일이 풀리면, 검진 결과가 좋으면, 그때 감사하겠다고요. 저도 마음속에 이런 외상 장부를 꽤 두툼하게 갖고 있습니다.

게다가 좋은 것에는 금세 익숙해집니다. 새로 들인 물건에 며칠은 감탄하다가, 한 달 뒤엔 있는지도 잊지요. 빨리 갖추고 빨리 다음으로 넘어가는 생활 속도도 한몫합니다. 멈출 틈이 없으니, 이미 가진 것은 배경이 되어 버립니다.

순서를 뒤집은 수도사

오스트리아 태생의 베네딕도회 수도사 데이비드 스타인들-라스트 수사는 TED 강연에서 이 순서를 뒤집습니다. 행복이 감사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감사가 행복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모든 걸 갖추고도 늘 다른 걸 원해서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있고, 남들이 피하고 싶은 어려움 속에서도 환하게 빛나는 사람이 있다고요. 그 차이가 감사에 있다고 그는 말합니다.

그가 말하는 감사는 두 가지가 겹칠 때 생깁니다. 나에게 소중한 것일 것, 그리고 돈을 주거나 애써서 얻은 게 아니라 거저 받은 것일 것. 그렇게 보면 가장 큰 선물은 ‘지금 이 순간’입니다. 누구도 다음 순간을 벌어서 가져오지는 못하니까요. 그리고 그 순간 안에 든 진짜 선물은 ‘기회’라고 합니다.

물론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전쟁이나 폭력, 가까운 사람을 잃는 일에는 감사할 수 없다고 그는 분명히 말합니다. 다만 힘든 순간에도 배우거나 견뎌 낼 기회는 있고, 기회는 한 번만 문을 두드리는 게 아니라 놓치면 다음 순간 또 온다고 합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조금 안심했습니다. 놓친 게 한둘이 아니라서요.

연구도 이 방향을 받쳐 줍니다. 심리학자 로버트 에먼스와 마이클 매컬로의 2003년 실험에서, 매주 감사한 일 다섯 가지를 적은 사람들은 귀찮았던 일을 적은 사람들보다 다가올 한 주를 더 낙관적으로 봤고 운동도 더 했다고 합니다. 모든 지표가 좋아진 건 아니지만, 기분이 밝아지는 효과는 꽤 뚜렷했습니다.

한 줄 공식: 멈추고, 둘러보고, 해 보기

그럼 어떻게 하느냐. 수사의 답은 어릴 때 배운 길 건너는 법입니다. 멈추고, 둘러보고, 가라. 우리는 전력 질주하느라 멈추지 않고, 멈추지 않으니 기회를 지나친다는 것이지요.

감사 = 멈추고, 둘러보고, 해 보기.

재미있는 건 그가 직접 쓴 방법입니다. 식수가 귀한 아프리카에 머물다 유럽으로 돌아오자 수도꼭지를 틀 때마다 감사했는데, 그 마음이 금방 사라지더랍니다. 그래서 수도꼭지와 전등 스위치에 작은 스티커를 붙였다고 합니다. 평생 수행한 수도사도 스티커의 도움을 받는다니, 저는 괜히 위로가 됐습니다.

다시, 아침 수도꼭지 앞에서

그래서 저도 이렇게 해 볼까 합니다. 스티커까지는 아니어도, 아침에 물을 틀 때 딱 한 번 숨을 고르는 것. 물의 온도를 느끼고, 창밖 날씨를 한 번 보고, 오늘 누군가에게 먼저 건넬 말 하나를 떠올리는 것. 거창한 감사 일기보다 이쪽이 제 성격엔 오래갈 것 같습니다.

감사가 모든 걱정을 지워 주지는 않을 겁니다. 효과의 크기도 사람마다 다를 테고요. 다만 행복해질 때까지 감사를 미뤄 둘 필요는 없다는 것, 그건 꽤 반가운 소식입니다.

내일 아침에도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나올 겁니다. 아마 저는 또 잊겠지요. 그래도 괜찮습니다. 수사 말대로라면 기회는 다음 순간에 또 오니까요. 모레 아침에도, 물과 함께.

댓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이 기록은 여기까지지만,
생각은 아직 이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