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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는 결심한다고 되는 게 아니더군요

2026.10.06

용서는 결심한다고 되는 게 아니더군요

2026.10.06

출처: “The Keys to Forgiving the Unforgivable” — Everett Worthington, TEDxYouth@RVA · 영상 보기
교차 확인: Greater Good Science Center 기사 · Everett Worthington 공식 페이지

오래전에 저를 서운하게 했던 사람 이름이 어쩌다 대화 중에 툭 튀어나오면, 저도 모르게 목소리 톤이 바뀌는 걸 느낄 때가 있습니다. 분명 다 지난 일이고 웃으며 넘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마음 한구석에 눌러놓은 스위치가 아직 살아있었던 거죠. 저는 이걸 속으로 ‘마음의 임플란트’라고 부릅니다. 평소엔 멀쩡하다가 꾹 누르면 여전히 욱신거리는.

“이제 그만 용서하고 넘어가자”고 다짐해본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 ‘다짐’과 ‘진짜 편안해짐’ 사이에는 좀처럼 메워지지 않는 거리가 있더군요. 그 간극의 정체를 최근에야 제대로 알게 됐습니다.

왜 결심만으로는 마음이 안 풀릴까

곰곰이 따져보니 제가 헷갈렸던 건 용서를 한 가지 일로 뭉뚱그려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심리학자 에버렛 워싱턴은 이걸 두 가지로 나눕니다. 하나는 ‘결정적 용서’로, 상대에게 더는 복수하지 않고 괜찮은 사람으로 대하겠다는 의지의 영역입니다. 다른 하나는 ‘감정적 용서’인데, 분노나 원망 같은 감정이 실제로 공감과 연민 같은 감정으로 바뀌는 쪽입니다. 저는 늘 전자만 해놓고 후자가 저절로 따라오길 기다렸던 셈입니다. 의지로 결심은 할 수 있어도, 감정은 의지만으로 복종하지 않는다는 걸 몰랐던 거죠.

꽁한 마음을 놓지 못하는 건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다

사회적으로 우리는 “독하게 잊지 않겠다”는 말을 꽤 멋지게 포장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몸은 그 멋짐을 별로 반기지 않는 모양입니다. 워싱턴에 따르면 원한을 품을 때 분비되는 코르티솔이라는 스트레스 호르몬이 혈압과 면역력, 심지어 수면의 질에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꽁한 마음을 놓지 못하는 건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그 반대로 너무 오래 긴장 상태를 유지해온 결과에 가깝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용서는 상대를 위한 선심이 아니라, 내 몸과 마음을 긴장에서 꺼내주는 꽤 실리적인 선택이 됩니다.

어머니를 잃은 심리학자가 발견한 다섯 글자

이 강연이 특별하게 다가온 이유는 워싱턴 교수가 그냥 책상에서 이론을 만든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강도에게 목숨을 잃은 당사자였고, 그 상실을 끌어안고 평생 용서를 연구했습니다. 강연에는 또 한 사람이 등장하는데, 어린 시절 납치되어 큰 상해를 입었던 크리스 캐리어라는 사람이 22년 뒤 자신을 해친 사람을 직접 찾아가 용서한 이야기입니다. 그 용서는 두루뭉술한 선언이 아니라, 상대의 사과와 뉘우침을 보고, 공감하고, 끝내 가족 앞에서 다짐을 지켜낸 구체적인 과정이었다고 합니다.

REACH라는 다섯 글자 공식

워싱턴은 이 과정을 연구를 거쳐 REACH라는 다섯 단계로 정리했습니다.

  • 기억하기(Recall) — 상처를 외면하지 않고 제대로 떠올리기
  • 공감하기(Empathize) — 상대의 입장에서 한 번 헤아려보기
  • 이타적 선물(Altruistic gift) — 받을 자격이 없어도 내어주기
  • 다짐하기(Commit) — 그 마음을 붙잡아두기로 하기
  • 지켜내기(Hold) — 의심이 들 때도 놓지 않기

중국, 콜롬비아, 르완다 등 여러 나라에서 수천 명을 대상으로 이 방식을 실험했더니 우울감과 불안이 줄고 삶의 만족감이 늘었다는 결과도 있었다고 합니다.

다만 이 수치들이 모든 상처, 모든 문화에 똑같이 들어맞는다고 단정하기는 어렵고, 아주 심각한 트라우마라면 전문가의 도움을 함께 받는 쪽이 안전합니다.

다시, 오늘 아침

용서는 상대를 위한 선심이 아니라, 내가 원한의 긴장에서 풀려나는 가장 실리적인 선택입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누군가의 이름에 마음이 욱신거릴 때, “용서해야지”라고 뭉뚱그려 다짐하는 대신 딱 한 단계만 해보려 합니다. 오늘은 그냥 그 일을 외면하지 않고 한 번 제대로 떠올려 보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요. 다섯 글자를 다 채우지 않아도, 첫 글자 하나만 떼어봐도 어깨가 조금은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더군요. 마음의 임플란트도 매일 누르다 보면 언젠가 무뎌지는 날이 오려나, 하는 기대를 슬쩍 품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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